[뒤척이다] “소수자”가 불편한 “소수자” 운동

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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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4일,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를 발족하며, 단체 발족을 맞아 활동가들의 입장을 알리고 다짐한다는 의미에서 발족선언문을 읽었다. 발족선언문의 첫문장은 “우리는 소수자가 아닙니다”였다. 많은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성 소수자”로 분류하고 이른바 “소수자 운동”의 한 범주로 얘기하는 마당에, 트랜스젠더를 둘러싼 맥락들과 관련한 운동을 하는 단체가 발족선언문에서 “소수자가 아니다”라고 얘기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소수자”에 대한 이해

“소수자”란 말 자체의 의미는 수적으로 적다는 의미가 아니라, 권력관계에서 소수란 의미에서 “소수자(minority)”이다. 현재 사회를 살아가며,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동성애자의 삶, 젠더는 태어날 때 할당한 숫자에 따라 평생 바뀔 수 없다고 얘기하는 사회에서 이런 인식이 잘못 되었다고 얘기하는 트랜스젠더들의 삶은, 그 사회의 지배규범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간주되며, 이런 맥락에서 (피)해를 경험하고 있기에 “(권력적으로) 소수자”라고 부를 수 있다.

“소수자”에 대한 오해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있어,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 건, 사람들이 이 용어를 “수적으로 적다”란 의미로 더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깨달으면서부터다. “트랜스젠더는 몇 명당 한 명 꼴로 나타난다”, “한 사회에서 동성애자는 10~15% 정도이다”, “사람 수도 얼마 안 되는데, 이들을 고려한 정책을 시행하는 건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이다” 등등의 언설을 듣기 시작했을 때, 소수자란 말은 더 이상 “권력 관계에서의 소수”란 의미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인구통계 상으로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소수자”로 분류되지 않는 이들만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소수자 범주”에 포함되는 이들 역시, “우리가 수적으로 적으니 너무 과도한 주장은 하면 안 되고”라는 식으로 말을 하곤 했다. “소수자”와 유사한 “(사회적) 약자”란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이 말 역시 권력관계에서의 “약자”란 의미지만, “그들은 약하니까 보호해야 한다”, “사회에서 포용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약자들”이란 식으로 “약자라는 범주의 사람들”을 지시하는 걸 듣곤 했다. “약자라는 범주의 사람들” 역시, 종종 스스로를 “우리는 약하니까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는 식의 말을 한다. 이렇듯, “소수자”/“약자”란 용어는 기존의 지배규범을 성찰케 하고 상대화하기 보다는, 기존의 지배규범을 그대로 둔 채, 그런 규범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설명하고 주장할 수 있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사용은, “원래의 의미”를 몰라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 “원래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홍보해서 ‘제대로’ 사용하도록 해야 할까? 모든 언어는 “왜곡”이라는 해석의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잘못” 사용하고 있다기보다는, 이 용어 자체가 수적인 의미를 상기시키는 한계가 있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끊임없이 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맥락은 무엇인지를 고민할 문제이다.

“소수자”란 말이 정말 불편한 이유, “우리는 소수자가 아닙니다”란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소수자”란 말이 상당히 맥락적인 의미임에도 마치 고정된 의미거나 분명한 경계를 지닌 범주처럼 “소수자”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차이들을 드러내지 못하는 “소수자”

만약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들을 소수자로 묶는다면, 어떻게 이런 묶음이 가능할까. 이성애-성별이분법에서 “억압”받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트랜스젠더만 하더라도, 개개인들의 이해관계가 동일하진 않다. (트랜스젠더는 마치 의료과정과만 관련 있는 것처럼 여기는 인식 때문에 이런 예는 불편하지만) 일테면, 트랜스젠더들이 의료과정과 관계를 맺고 있는 방식만 해도 개개인마다 상당히 다르다. 어떤 이는 수술을 하고 호적상의 성별을 변경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수술은 했지만 호적상의 성별은 바뀌지 않은 이들, 현재 호르몬 투여를 하고 있고 어느 정도 수술을 한 이들, 호르몬 투여를 준비 중에 있는 이들, 그리고 호르몬이나 수술을 안 하겠다고 말하는 이들까지, 트랜스젠더가 의료과정과 관계를 맺는 정도는 상당히 다양하다. 이들마다 요구사항이 다 다르기 마련이라, 군대문제가 가장 시급할 수도 있고, 취직이 안 되어서 생계가 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규직이라 생계와 수술비는 어느 정도 모았는데 아직 호적상의 성별변경을 못 하고 있어 성별변경이 시급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이런 제도적인 측면보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성별이분법으로 구분하는 사회문화적인 인식이 더 문제라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다. 트랜스젠더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른데 “소수자”로 묶어서 운동을 한다면, 의도하건 하지 않건 특정 누군가의 이득을 우선시하기 마련이고 그리하여 다른 이들의 시급함은 “여건 상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는 것이 되기 마련이다.

다른 한 편, 이런 명명은, “소수자”를 오직 “소수자”로만, 트랜스젠더를 “트랜스젠더”로만 수렴해버리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트랜스젠더는 24시간 내내 트랜스젠더이기만 한가? 나는 오직 트랜스젠더일 뿐이며, 내게 트랜스젠더가 아닌 다른 맥락들은 전혀 없는가? 평생 변할 수 없는 성별이분법이란 규범의 맥락에서 트랜스젠더는 “소수자”일 수 있지만, 트랜스젠더들이 성별이분법만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정규직인 트랜스젠더가 있는가 하면 비정규직인 트랜스젠더가 있고, 중상층 계급의 트랜스젠더가 있는가 하면 하층의 트랜스젠더가 있다. 어떤 트랜스젠더에겐 호르몬 투여보다는 비정규직이라는 생계의 불안정함이 더 큰 문제로 여겨질 수도 있고(이 두 경험을 분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트랜스젠더에겐 학벌과 학력이 더 큰 문제다. 만약 한 트랜스젠더가 회사의 사장인데 노동착취라도 한다면, 이럴 때 그는 가해자 혹은 기득권자로서의 위치이다. 하지만 “트랜스젠더는 소수자다”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순간, 모든 트랜스젠더는 동일한 경험을 하고, 가해자이거나 기득권자일 수 없는 ‘순수한 피해자’로서의 위치만 부각하여, 자신의 복잡한 위치를 성찰하지 않을 수 있게 한다.

새로운 “소수자” 운동의 전략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수자다”라는 말을 통해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소수자다”라고 주장하지 않으면 나를 주장할 수 없게 하는 상황들에 문제제기해야 하지 않을까. “소수자”이거나 “약자”여서 이만큼 고통 받고 있다는 식의 ‘전시’를 하지 않으면 주장할 수 없게 하는 상황들에 문제제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소수자”란 말 자체를 폐기하자는 건 아니다. “소수자”란 말을 둘러싼 어려움은 이 용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이다. “소수자”란 범주로 수렴하지 않으면서, 즉 내가 기득권자나 가해자로서의 위치에도 있음을 은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성애-성별이분법에서 경험하는 (피)해들을 풀어낼 수 있을까. “소수자”란 맥락에서의 경험이라고 해서 피해 경험 혹은 힘든 경험만 있는 건 아닌데, 그렇다면 이런 경험들은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소수자”란 용어 사용을 둘러싼 논의가 있을 때마다, 언제나 이런 복잡한 감정에 빠진다.
덧붙이는 글
루인님은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입니다.(runtoruin@gmail.com)
인권오름 제 64 호 [기사입력] 2007년 07월 25일 2: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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