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투, 여덟살 구역] 당신을 이해하기까지

엠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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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한 해 동안 ‘책언니’를 하면서 가장 대하기 까다로웠던 친구가 있었다. 지역아동센터에서 만난 예진(가명)이가 그랬다. 1학기 때까지만 해도 나와 죽이 잘 맞았던 친구였다. 우리 둘이서만 구석에 박혀 수다 떨 때도 종종 있었고, 여름 무렵에는 식당에서 다 같이 마실 물을 떠오는 일로 둘만의 유대를 다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점점 더 친해지면서 예진이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반년 간의 학교생활에서 터득한 것들이지 싶은데, 2학기 들어서 부쩍 이 친구가 나와 힘 재기를 하려 들었다. 쩡열에 비해 좀 더 만만한 느낌이 드는 나를 맘대로 끌고 다니려 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같이 물을 뜨러 가자고 하는 게 아니라 나보고 물을 떠 오라고 시키기 시작했다.

그즈음 다른 수업에서도 스스로 너무 호구 캐릭터로 고정되는 게 아닌가 싶어 나름대로 애들과의 밀당을 시도하고 있었던 나는 ‘이때다!’ 싶어 새침한 표정으로 ‘싫은데?’ 하고 대답했다. 그동안 '책언니'에서 내가 취하던 모습은 항상 애들이 하자는 대로 다 하고, 괴롭히는 대로 순순히 당하는(?) 바보 언니 캐릭터였다. 그러던 것이 할 말은 하고, 싫은 건 개기고, 단호할 땐 단호하게 구는 것으로 이쯤에서 캐릭터의 변화를 꾀했다. 다른 수업에서는 나름 통했던 이 가벼운 밀당이 예진이와의 대치에서는 역효과를 일으켰다. 순식간에 표정이 변한 예진이는 자리를 떴다. 그리고 이날을 기점으로 예진이와 나의 관계 역시 변화했다.

물론 정확히 물 사건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얘가 나한테 왜 이러는지 도통 감이 안 왔다. 예진이는 그 날 이후로 내 앞에서만 냉랭해졌고, 심할 땐 나와 말도 안 하려고 들었다. 나는 그런 예진이를 보면 일주일에 한 번 씩 멘붕에 빠졌다. 수업을 하고 돌아가는 길이면 언제나 기운이 쭉쭉 빠지고 우울해졌다. 근 두 달을 넘게 이어진 냉전이었다. 끝까지 까칠하게 구는 예진이가 처음엔 당황스러웠고, 갈수록 힘들고 막막했고, 나중에는 화가 났다.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못내 억울한 마음이 점점 자라났다.

나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니야

얼마 전 예진이가 어디서 구했는지, 줄을 하나 가져와서 허공에 휘두르며 놀고 있었다. 마침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그 줄이 우연히 내 등에 닿았던 것 같다. 바로 돌아서서 그건 하지 말자고 제지를 했더니, 순간 예진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곧장 손에 들고 있던 줄을 내 얼굴 쪽으로 휘두르는데, 순간적으로 내 안에서 뭔가가 뚝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모르게 버럭 “야!”하고 큰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무서운 목소리로 화를 내고 말았다. 이 친구들이랑 거의 1년을 만나면서 이렇게 진심으로 화를 낸 적은 처음이었다.

예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어붙더니 경기하듯 울음을 터뜨렸다. 그 겁먹은 눈을 마주 보는데, 이 애가 가진 공포가 읽혔다. 큰소리 치면서 화내는 사람. 주변에 또 있구나. 자주 겪어봤구나. 직감적으로 느낌이 왔다. 그냥 보이는 반응 같지는 않았다. 예진이는 밖으로 도망치듯 나가버리고, 쩡열은 그 뒤를 쫓아가고, 나는 망연자실해서 강당에 남았다. 놀라움, 충격, 자괴감, 서러움, 복잡한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았다. 그동안 예진이를 만나면서 쌓여 있었던 감정들이 조금 전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는 걸. 무겁고 낮게 깔린 내 목소리에는 ‘나는 사실 네가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만만한 '책언니'는 개뿔. 그건 일종의 착한 어른 가면 같은 거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 애들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른으로서 가진 힘을 사용했다. 나는 어느 시점부턴가 예진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참아내고 있었다. 참고 있다는 건 언젠가는 인내의 순간이 끝난다는 걸 의미한다. 수업 끝나고 공간을 나설 때마다 ‘그래도 이해해야 해 (사실은 화가 나지만 그래도 참아야 해)’ 라고 주문처럼 되뇌길 두 달째. 애초에 도덕적 강박으로 쌓았던 엉성한 이해의 둑은 그렇게 순식간에 무너졌다.

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예진이를 만나는 동안 어떤 위화감이 내내 가시지 않았다. 어쩐지 이 애가 한 겹 막을 쓰고 사람을 대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예진이는 의외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 애의 유난히 새까만 눈동자처럼 어두운 막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느꼈다. 그건 사실 예진이가 왜 그런 행동들을 보이는지 선뜻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 했던 내가 마음속에 세워두고 있었던 무의식적인 벽이었다.

그 날 예진이의 겁먹은 얼굴을 마주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움츠러들고 약한 얼굴이 이 친구가 감추고 있었던 진짜 얼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진이 아빠가 무섭다는 소리는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나중에 수업이 모두 끝날 무렵 센터 선생님에게 전해 들었다. 큰소리치면서 애를 혼냈던 건 예전에 (지금은 같이 살지 않는) 예진이의 엄마가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예진이가 아빠는 참 좋아한다. 거기까지 듣고 아빠는 좋은 분이라 생각하고 조금은 안심했는데, 뒷얘기가 더 있었다. 이 아빠도 예진이에게 그저 좋고 편한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아빠가 예진이의 언니를 자주 때렸던 모양이다. 언니는 언니대로 집에서 그 화를 예진이한테 풀었다는 것 같고. 폭력의 먹이사슬. 예진이는 이 사슬의 가장 아래 칸에 있는 사람이었다.

예진이는 우리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님’ 호칭을 고집하던 애였다. 이 친구에게 어른은 기본적으로 전부 무서운 사람들이었을 것 같다. 가까운 가족들부터가 일상적으로 예진이를 두렵게 했을 테니까. 그런 만큼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고 자기를 들어내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방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밖에도 예진이가 보였던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예진이는 수업에 와서 자기가 가진 물건을 자랑할 때가 많았다. 물건이나 돈에 대한 욕심이 꽤 있었다. 애초에 집안 형편이 어려운 편이었던 것도 있겠지만, 학교에서 예진이가 좀 무시 받을 수도 있겠다고 짐작했던 것이 여자애치고는 몸집이 꽤 있는 편이다. 같이 수업하는 남자애들만 해도 예진이를 돼지라고 놀렸다. 집도, 학교도, 어딜 가도 나를 몰아붙이는 환경 속에서 예진이는 자기 나름의 생존법을 찾아내야 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 자기를 과시하기, 나보다 만만한 사람에게는 센 척하기, 여덟 살 아이가 하는 자기방어라는 게 사실 아직 거칠고 서툴렀는데도 당시에는 그게 잘 안 보였다. 내가 속상한 게 앞서서 애가 왜 그러는지, 머리로는 짐작해도 잘 받아들이질 못했다.

예진이가 가르쳐 준 것

'책언니' 하면서 어린 사람들에게 좀 더 애정이 생겼다 뿐이지, 원래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 많고 다정한 편은 아니었다. 내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그 날 예진이에게 화를 낸 것 자체는 후회하지 않는다. 내 얼굴을 향해 줄을 휘두르던 예진이의 모습은 나한테도 상처였다. 그런 상황에서까지 참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날의 상황을 만든 건 ‘나’였다고도 생각한다. 그 애가 어떤 사람인지 이 정도로 고민하게 된 건 그때의 겁먹은 얼굴을 마주하고 난 이후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형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했다. 수업 하는 것, 같이 있는 2시간을 잘 보내는 것까지가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예진이가 날 밀어내고부터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근처에 잘 다가가지도 못했다.

착한 언니 가면을 쓰고 예진이를 적당히 대했던 건 오히려 내 쪽이다. 그 애매함을 느꼈으니까 예진이도 더 마음을 열지 않고, 심술을 부렸겠지. 예진이 말고도 우리한테 막 대하는 애들은 종종 있다. 우리도 인간이다 보니 어쩔 땐 감정조절이 잘 안 된다. 어른인 우리가 더 권력관계의 우위에 있으므로 화를 참아야 한다고, 그게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방식이라고, 반드시 표현해야 할 내용이라면 애들이 겁먹지 않을만한 태도나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그래, 예전 같으면 이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겠지만, 예진이 건을 겪고 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다.

감정을 참는다고 해서 이미 생긴 미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예진이를 겁먹게 한 건 그 애를 향한 내 미움이기도 했다. 사람 만나는 일 하면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지 않으면 내가 예진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쉽게 미워하게 되고, 상처 주게 된다.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은 눈앞에 있는 사람 한 명, 한 명이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고, 이 친구들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채는 일이란 걸 예진이를 통해 단단히 배웠다. 그러나 그 모임과의 수업은 끝이 났고, 아마도 다시 예진이를 보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고민이 너무 늦었다. 이해가 너무 늦었다. 있을 때 잘하란 말이 왜 지금 떠오르나 모르겠다. 씁쓸하다.
덧붙이는 글
엠건 님은 '교육공동체 나다' 활동가 입니다.
인권오름 제 422 호 [기사입력] 2015년 01월 14일 19:4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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